"너는 주인이 집 올 때까지 기다리는 강아지같아"
줄곧 숨이 막혀왔던 A가 이윽고 연인 B에게 말했다.
"응 맞아" B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에 수긍했다. 어쩌면 넌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반응같기도 했달까.
나만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불안한 여자친구 vs.아직 혼자 하고 싶은게 많은 남자친구
남자친구 A는 신문사 기자다. 대선, 총선 같이 예정된 정치 이슈가 다가올 때는 당연히 바쁘다.
그렇지 않은 시즌에도 사건 터졌다는 말을 들으면 부리나케 업무 전선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저연차 기자라면 주말에도 불려나가거나 평일 저녁은 취재원과의 식사 자리로 채워진다.
기자이거나 기자 친구를 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은 술 한 잔 가볍게 걸치는 모임 자리에도 늘 노트북을 끼고 다닌다.
휴대폰을 확인하곤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한숨을 내쉬며 술상 위에서 노트북을 펼치는 게 일상이다.
그의 어린 여자친구 B는 그게 내심 못마땅했다.
매일 보고 싶었다. 매일 데이트 하고 데이트 하지 못하는 날에는 전화라도 오래 붙잡고 일상을 나누고 싶었다.
직업이 그러하니 바쁜 건 이해해주었다. 서운했지만. 그래 솔직히 티 내긴 했지만 내 딴에는 참고 참다가 몇 번 티 내 본 거다.
내가 원하는 것만큼 자주 만나지 못하니
A가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자기에게 와주길 바랐다.
그런데 A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며 친구들과 게임을 하거나
저녁은 집에 가서 먹는다더니 들어가는 길에 동네 친구들과 밥먹고 얘기 좀 하고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이 (B가 보기엔)잦았다.
B는 20대 중후반이지만 차라리 남자친구 A와 어서 결혼하고 싶었다.
B는 조금은 답답하고 아픈 시절이었던 유년기를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싫고 남자친구와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안락했다.
자기보다 경제력도 좋고, 자신을 다독여줄 수 있는 독립적인 B에게서 바람직한 가장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남자인 A와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A는 그게 참 부담스럽다. 취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
한국 나이로 고작 서른이 된 자신에게는 아직 미혼의 신분으로 해보고 싶은 게 많았던 거다.
여자친구가 싫은 건 아니지만
기혼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아직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겠지.
요즘 20대후반~30대 중반 결혼적령기에 든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 아닐까
그런데 여자친구는 그걸 말 안해도 안다. 온몸으로 눈빛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윽고 이렇게 소화하기에 이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큼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나봐.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굳이 남녀를 달리 보자는 건 아니지만) 여자로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얼마나 자존심 상할지. 얼마나 슬프고 애타고 고달플지. 그리고 또 불안할지
불안 / 슬픔 / 비참 / 공포 / 긴장 / 우울 / 후회 / 외로움 / 서운함 / 짜증 / 원망 / 질투 / 시기...
부정적인 감정을 나열해보았다.
'불안'을 가장 앞에 둔 이유가 따로 있다.
'불안'은 다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이끌고 나오는 "부정 감정단의 기수"다.
맨 앞에 서서 깃발을 들고 행진하며 다른 부정 감정을 쭈욱 이끌어낸다.
그렇기에 불안함은 언제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불안함과 그것이 끌고 나온 부정적인 감정은 상대에게 옮겨간다.
여자친구가 자꾸 서운해 해. 나는 내 시간도 중요한데.
여자친구는 매일 기분이 안 좋대. 매일 안 좋은 일이 생긴대.
얘는 대체 언제 기분이 좋은걸까. 기분 좋은 날이 있긴 한걸까.
여자친구가 존나 울어. 매일 울어.
왜 우는지도 모르겠대. 나는 그럼 일단 미안하다고 해. 맨날 미안하다고만 해.
A는 친구들과 게임하다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PC방을 나가 한시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여자친구한테 심각한 일 생긴 거 아냐?"
"아냐 그냥 기분이 안 좋대. 일상 얘기. 그런데 털어놓다 보니 괜찮아졌나봐."
누가 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는가.
슬픔, 서운함, 짜증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은 타인에게 던져진다.
짜증을 부리면 그렇게 하는 대로 당장 나 하나 기분은 후련해지겠지만,
그걸 다 받고 난 상대방은?
내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짜증이 이양된 상태로 남겨진다.(에휴,, 나도 항상 조심해야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저 조금 속상했던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인데.
그게 단지 매일 연락하는 너였을 뿐인데.
나는 너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려던 게 아니라, 굳건한 지지대에 기대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암덩이처럼 증식해서 두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럼 시발 뭐 어떻게 해야할까
어려운 일이다
물리적으로는 상대방에게 칭얼대는 빈도를 줄이고
정서적으로는 스스로 맷집을 키워서 웬만한 일은 별일 아니게 느끼게끔 만들어야 하나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것 뿐이다
나도 아직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이것도 아니면, 내 말을 들어주는 상대방이 대충 대답하거나.
내가 아무리 칭얼거려도 듣는 상대가 "응 그랬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둘 다 스트레스 덜 받을 수 있지 않나, 어쩌면 이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예민한 사람과 무던한 사람이 잘 맞는다고 하나보다
모두 미성숙한데 어쩌다 운이 좋아서
나와 요철이 맞는 퍼즐 조각을 베필로 만나길 빌어야 할까
A는 친구들에게 여자친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연애를 못 해봐서 서툴러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는 제쳐두고서 나와 여자친구가 안 맞는 건지
관계를 행복하게 잘 이끌어 나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굴뚝 같았을 것이다.
즉, A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B는 차라리 그럴 시간에 자기한테 전화하는 걸 더 기다리지 않을까?
"여자친구야, 나는 네가 힘들지 않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힘들지 않거든
앞으로도 너의 이야기를 들을거야. 그건 걱정하지마.
하지만 안 좋은 얘기는 조금 덜 듣고 싶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야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할까?"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도망가는 사람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만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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